들어가며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일기를 성실하게 쓰는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종종 검사 전날이면, 어쩔 수 없이 밀린 일기를 쓰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중학생이 되자 일기는 더 이상 숙제가 아니게 되었다. 어째서인지 그즈음부터 스스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의무나 형식에서 벗어난 나만의 글쓰기는 꾸준히 이어졌다. 하루의 사소한 기억이라도, 그것이 기록되지 않으면 언젠가 잊혀 버리는 게 나는 아쉬웠다. 그것이 자발적 글쓰기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시대의 변화를 타고 일기를 쓰는 매개체에도 나름의 변화가 있었다. 중학생 때까지는 손글씨로 작은 메모장이나 공책에 썼다면, 고등학생 때부터는 아이리버 전자사전(메모장 기능이 있었다)이나 싸이월드 (비공개)다이어리에 글을 썼고, 개인 노트북을 갖게 된 대학생 이후부턴 줄곧 윈도우 메모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키보드로 쓴 일기들은 그저 폴더 안에 딸깍 저장될 뿐, 나는 그것들에 대해 별다른 관리 방법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이전에 쓴 글들을 다시 들춰보는 일도 잦지 않았다. 그러던 20대 후반의 어느 날, 출근길에 실수로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린 일이 있었다. 아뿔싸. 그때 가장 먼저 아찔하게 스쳤던 건 가방에 든 지갑도 노트북도 아닌, 노트북 안에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글들이었다. 다행히 그날 밤 버스 차고지에 찾아가 운 좋게 노트북을 되찾아올 수 있었는데, 그 사건 이후 각성이 찾아왔다. ‘노트북의 글들을 웹상 어딘가에 이중으로 저장해 둬야겠다.’
이후 하루에 몇 편씩 지난 글들을 에버노트에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손글씨로 쓴 학창 시절의 일기장도, 싸이월드 다이어리도, 하물며 군 시절에 쓴 훈련병 일기장까지도 모두 자연스럽게 그 작업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래서 태엽 씨는 뭘 하고 싶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직장에서, 간혹 나에게 그렇게 묻는 동료나 선배들이 있었다. 제각기 그 질문을 던지는 상황과 뉘앙스는 조금씩 달랐지만, 뭐가 됐든 엄연히 같은 회사에 소속되어 비슷한 일을 하는 사이끼리 그런 걸 넌지시 묻는 게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련히 하고 싶은 게 있겠거니 짐작해 주면 안 되나. 무언가 들킨 기분이 들어 실은 야속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당시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에 큰 열정도, 별다른 재능도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매번 마땅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던 나는 이후 오래도록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게. 나는 뭐가 하고 싶을까. 지난날에 쓴 글들을 더 자주 들춰봤다.
줄기차게 써놓고는 구태여 읽어보지 않았던 과거의 일상과 생각들을 복기하다 보면 재밌기도 하고, 아련해지기도 했다. 당시의 사소한 일화들, 나름 치열했던 고민과 후회들, 이제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이들과의 다정한 기억들, 그리고 더 나은 날들을 바라며 쓴 많은 다짐의 글들까지. 미래의 듬직한 나에게 짊어지운 그 멋진 각오들을 살펴보면, 미래의 나는 한결같이 오늘의 나보다 더 풍성하고, 더 인정받고, 사사로운 어긋남에도 초연한 어떤 경지의 나날을 살고 있으리라 꿈꾸고 있었던 듯하다. 마치 내 진짜 인생과 꿈은 그 미래에 있다는 듯이. 늘 그 미래에 가장 가까웠던 나는, 여전히 나였을 뿐이었다. 되레 조금씩 초연해진 것이 있다면,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의 직장을 그만둔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여전히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이라는 직업명을 가진 직장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아키비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이 되어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전후 시기에 쓴 글들을 엮은 것이다. 기획 초반엔 직업 세계를 근사하게 드러내는 어느 직업인의 에세이를 꿈꿔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그런 느낌과는 좀 다르다. 그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의 일기장에 가까울 것이다.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고자 하니 그렇게 되었다.
책을 내며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회고를 빙자하여 무심코 드러날지도 모를 나의 안일함과 멋모름 같은 것들이다. 알량한 글재주로 복잡하게 꼬아 숨긴 어떤 생각들은, 간혹 저 멀리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이에게 단숨에 읽히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드러내본다. 나는 늘 적당히 나였으나, 그것으로 괜찮았다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또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만나게 될 거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