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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김태엽
1990년생. 서울 출생.
취미는 양궁.
하는 일은 기록물관리전문요원.
하고 싶은 건 아키비스트.

들어가며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일기를 성실하게 쓰는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종종 검사 전날이면, 어쩔 수 없이 밀린 일기를 쓰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중학생이 되자 일기는 더 이상 숙제가 아니게 되었다. 어째서인지 그즈음부터 스스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의무나 형식에서 벗어난 나만의 글쓰기는 꾸준히 이어졌다. 하루의 사소한 기억이라도, 그것이 기록되지 않으면 언젠가 잊혀 버리는 게 나는 아쉬웠다. 그것이 자발적 글쓰기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시대의 변화를 타고 일기를 쓰는 매개체에도 나름의 변화가 있었다. 중학생 때까지는 손글씨로 작은 메모장이나 공책에 썼다면, 고등학생 때부터는 아이리버 전자사전(메모장 기능이 있었다)이나 싸이월드 (비공개)다이어리에 글을 썼고, 개인 노트북을 갖게 된 대학생 이후부턴 줄곧 윈도우 메모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키보드로 쓴 일기들은 그저 폴더 안에 딸깍 저장될 뿐, 나는 그것들에 대해 별다른 관리 방법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이전에 쓴 글들을 다시 들춰보는 일도 잦지 않았다. 그러던 20대 후반의 어느 날, 출근길에 실수로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린 일이 있었다. 아뿔싸. 그때 가장 먼저 아찔하게 스쳤던 건 가방에 든 지갑도 노트북도 아닌, 노트북 안에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글들이었다. 다행히 그날 밤 버스 차고지에 찾아가 운 좋게 노트북을 되찾아올 수 있었는데, 그 사건 이후 각성이 찾아왔다. ‘노트북의 글들을 웹상 어딘가에 이중으로 저장해 둬야겠다.’

이후 하루에 몇 편씩 지난 글들을 에버노트에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손글씨로 쓴 학창 시절의 일기장도, 싸이월드 다이어리도, 하물며 군 시절에 쓴 훈련병 일기장까지도 모두 자연스럽게 그 작업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래서 태엽 씨는 뭘 하고 싶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직장에서, 간혹 나에게 그렇게 묻는 동료나 선배들이 있었다. 제각기 그 질문을 던지는 상황과 뉘앙스는 조금씩 달랐지만, 뭐가 됐든 엄연히 같은 회사에 소속되어 비슷한 일을 하는 사이끼리 그런 걸 넌지시 묻는 게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련히 하고 싶은 게 있겠거니 짐작해 주면 안 되나. 무언가 들킨 기분이 들어 실은 야속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당시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에 큰 열정도, 별다른 재능도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매번 마땅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던 나는 이후 오래도록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게. 나는 뭐가 하고 싶을까. 지난날에 쓴 글들을 더 자주 들춰봤다.

줄기차게 써놓고는 구태여 읽어보지 않았던 과거의 일상과 생각들을 복기하다 보면 재밌기도 하고, 아련해지기도 했다. 당시의 사소한 일화들, 나름 치열했던 고민과 후회들, 이제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이들과의 다정한 기억들, 그리고 더 나은 날들을 바라며 쓴 많은 다짐의 글들까지. 미래의 듬직한 나에게 짊어지운 그 멋진 각오들을 살펴보면, 미래의 나는 한결같이 오늘의 나보다 더 풍성하고, 더 인정받고, 사사로운 어긋남에도 초연한 어떤 경지의 나날을 살고 있으리라 꿈꾸고 있었던 듯하다. 마치 내 진짜 인생과 꿈은 그 미래에 있다는 듯이. 늘 그 미래에 가장 가까웠던 나는, 여전히 나였을 뿐이었다. 되레 조금씩 초연해진 것이 있다면,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의 직장을 그만둔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여전히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이라는 직업명을 가진 직장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아키비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이 되어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전후 시기에 쓴 글들을 엮은 것이다. 기획 초반엔 직업 세계를 근사하게 드러내는 어느 직업인의 에세이를 꿈꿔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그런 느낌과는 좀 다르다. 그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의 일기장에 가까울 것이다.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고자 하니 그렇게 되었다.

책을 내며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회고를 빙자하여 무심코 드러날지도 모를 나의 안일함과 멋모름 같은 것들이다. 알량한 글재주로 복잡하게 꼬아 숨긴 어떤 생각들은, 간혹 저 멀리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이에게 단숨에 읽히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드러내본다. 나는 늘 적당히 나였으나, 그것으로 괜찮았다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또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만나게 될 거라는 것도.

다른 업무에 대한 기록

2021년 4월 7일 수요일 밤 11시 19분 … 아니나 다를까 출근하자마자 팀장님과 둘이서 보고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처장님이 직접 계획안에 대한 꼼꼼한 피드백을 주셨고, 기록관장을 누구로 지정할지에 대한 세세한 부분도 직접 수정해주셨다. 그때 처장님이 요즘 일하는건 좀 어떻냐고. 어딘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내게 질문을 던지셨다. 평생 직장이라 생각하고, 시간이 좀 지나면 노무나 인사 같은 업무를 중점적으로 열심히 배우라 하면서. 그 다음 본부장님에게 보고를 드렸다. 본부장님은 상반기에 빨리 기록관리 업무를 끝내고 나를 다른 업무에 투입시키라고. 인사나 교육 쪽으로. 인자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곤 그 외에 코멘트는 없으셨다. 그리곤 잠시 사무실에 들렀다 바로 다시 팀장님 차를 타고 사장실로 갔다. 사장님은 임용식 때 이후로 간만에 본다 싶었다. 사장님은 계획안을 보곤 왜 여지껏 이 업무를 안했냐고. 말이 되냐고. 어쩐지 역정을 내시기에, 팀장님이 직접 세세하게 금년도 기록관리 업무의 방향을 읊으니, 그런 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급 관심을 끊으셨다. 정말이지 윗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보고를 오기전, 직원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사장님은 보고를 하러온 신입직원에게 전공을 묻는다고. 그리곤 그 전공과 부여된 업무의 성격이 부합하지 않으면 팀장에게 역정을 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이 사장님이 나에게 전공으로 무엇을 공부했냐 물으시기에, 나는 어딘가 자신있게 기록학을 전공했다 말하니 무슨 그런 전공도 있냐고. 아주 놀라하셨다.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폭풍같은 시간이 지났다. 사무실에 돌어오며 그래도 큰거하나 오자마자 했다고 팀장님이 칭찬도 해주시고. 마지막 사장님 결재가 최종적으로 났을땐 옆부서 팀장님까지 내 이름을 호칭라며 첫 결재를 축하해주셨다.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

기관 입사 후 약 한달 동안 나는 기록물관리 계획안을 작성하는 일에 매달렸다. 한 해 동안 기관의 기록관리 방향과 세부 실행계획을 세우는, 말하자면 기록관리 업무의 출발점이 되는 기본 업무였다. 팀 내부의 검토를 거치며 수차례 수정과 보완을 반복한 끝에 계획안은 결재선에 올랐다. 팀장님, 처장님, 본부장님을 지나 마지막 사장님까지. 신입사원의 첫 기안문 보고는 사장님에게 대면으로 진행하는 일종의 관행이 있었기에, 나는 팀장과 함께 차를 타고 사장실까지 이동해야 했다. 혹시 모를 질문에 대비해 온갖 기록학적 지식과 비전(?)을 머리에 한가득 인 채였다. 그날 결과적으로 사장님으로부터 들은 핵심 당부사항은 ‘어서 신입직원을 잘 가르쳐 빠르게 다른 업무에 투입하라’는 것이었다. 면접장에서부터 다른 업무를 겸하게 되리란 건 어느정도 예고되었지만, 막상 그런 노골적인 현실을 마주하자 당황스러웠다. 그날의 기억은 양가적이다. 조직은 기록관리 업무계획 수립을 축하해주었지만, 동시에 어서 빨리 내가 ‘다른 업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같은 부서의 J과장은 내게 흔히 말하는 ‘사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내가 입사했을 당시 3년 차의 부서 막내였던 그는 나를 같은 행정직 직렬의 첫 후임으로 여기며 유독 세심히 챙겨주었다. 덕분에 나는 그와 비교적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는 틈만 나면 내가 올린 기안문과 계획안을 손수 꼼꼼히 읽고는, 옆자리 앉은 나에게 세밀한 코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가르침은 책상 앞에만 머물지 않았다. 타 부서 직원과 상사를 대하는 태도, 회사 안의 미묘한 기류를 읽는 눈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견제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까지. 그는 사회생활의 요령이라 불릴 만한 것들까지 아낌없이 내게 전해주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러가는 길이면 아직은 혼자서 자연스럽게 쉬는 시간을 갖지 못하던 나를 함께 불렀다. 그렇게 잠시 바깥에서 숨을 고르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대리님. 기록물 직렬로 들어오셨어도 나중에 여기서 승진하려면 빨리 다른 업무를 해야 해요. 다른 부서 경험도 꼭 필요하고요. 잘 커야해요. 이 회사에서.” 그 말을 듣는 내 심경은 복잡해져만 갔다. 이게 아닌데 싶은, 어딘가 계속해서 단추가 잘못 꿰어지는 기분이 먼저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가 내게 건네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진심 어린 조언이라는 사실 역시 분명히 느껴졌다. 이곳에서 내가 인정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과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